2015년 3월 28일에 작성한 글을 바탕으로 웹에 맞도록 변환하고 일부 오탈자 수정과 함께 현재 상황을 추가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디자인 요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PPT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기본으로 사용되는 여러 폰트 까지 많이 고려하곤 했었다. 기본 글씨체인 굴림만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맑은 고딕이 처음으로 나왔을 때 거의 모든 문서에 그 폰트를 썼고, 또 그걸 너무 많이 보다 보니 단점들이 꽤 보여서 한컴오피스 2010에 동봉되었던 함초롬돋움#을 쓰기 시작했다.
네이버에서 2008년부터 한글날마다 나오던 나눔글꼴#을 봤다. 잠시 흥미는 있었지만 이내 다 사라져버렸다. 명조 계열은 원래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기에 그렇다고 치고, 고딕 계열을 보자. 나눔고딕은 고딕치고 너무 둥글다. 아무래도 굴림과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해를 거듭하면서 나눔글꼴에코, 나눔손글씨가 나왔지만 역시 나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산돌고딕네오#라는 예쁜 글씨체를 발견했다. 너무 갖고 싶어서 일단 견본집도 신청하고 여러 가지를 신청하여 많은 구경을 했다. 그러나 정말 구매를 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물론 구매를 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15만 원대의 폰트를 만 원대로 할인하는 한글날 이벤트#가 이미 끝나버린 이상 구매는 현실적으로 너무나도 힘겨웠다. 부끄럽지만 불법 복제를 하기로 마음먹고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하나도 없었다. 인터넷을 다 돌아봐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견본집 PDF 파일이 전부였다. 불법 복제를 하려 해도 파일이 없어서 못 하는 상황. 결국 몇 날 밤을 투자하여 공식 홈페이지의 미리보기 swf 파일로부터 낮은 퀄리티였지만 조금이나마 체험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2013년 한글날에는 네이버에서 나눔바른고딕이 출시되었다. 이건 나의 관심을 끌 만했다. 가장 싫었던 둥글둥글한 점이 모두 사라지고, 매우 깔끔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사용하고 있었던 산돌고딕네오에 비해 굵기 종류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내가 폰트를 정말 폭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산돌커뮤니케이션의 산돌구름# 덕분이었다. 굉장히 광고같은 문장이지만, 폰트 파일을 ‘사는’ 것에서 ‘빌리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어 출시된 서비스는 굉장히 매력적인 가격에 많은 폰트를 사용할 기회가 되었다. 학생 할인도 존재하여 그야말로 ‘박리다매’를 연상시킬 정도의 마케팅을 펼쳤다. 물론, 내 재정 상태를 고려하면 그 가격도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출시를 기념하여 진행된 여러 프로모션들을 활용하니 아래처럼 엄청난 기간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OS X의 기본 글꼴은 산돌고딕네오1을 베이스로 하여 제작된다. 산돌고딕네오1의 영문 글자형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나는 OS X에서 글꼴을 가져오는 것을 시도했고, 성공하여 현재 이 문서에 사용하는 것처럼 산돌고딕네오의 한글 글자형과 Helvetica Neue의 영문 글자형을 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는 UltraLight 굵기를 사용하여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이쯤부터 폰트에 대한 조금 더 전문적인 지식을 얻고 싶어졌다. 윤디자인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타이포그래피 전문 매거진 <the T>를 사서 읽기 시작했다. “라틴알파벳의 이탤릭체와 한글의 흘림체 비교연구”#도 재미로 읽어보기도 했다. 참고로 저 논문의 두 번째 페이지에 “이택릭체”라는 오타가 존재한다.
이 서비스를 의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윤디자인연구소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윤멤버십’이라는 상품이 있다. 출시하고 어느 정도 프로모션이 있겠거니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혀 나오지를 않았다. 그냥 심심해서 웹페이지를 둘러보다 보니 취약점이 있었다. 즉시 정리해서 제보했다. 보상을 바라고 제보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정만 막히고 특별한 것이 없어서 조금 아쉽기는 했다.
HY시리즈로 유명한 한양정보통신에서 HYGothicA1#이라는, 99단계의 웨이트를 갖는 폰트 패밀리에 대한 떡밥을 던졌다. 산돌고딕네오, 윤고딕 700대의 9단계 웨이트에도 놀랐던 나에게는 정말 큰 충격이었다. 다만 그렇게 글자가 예뻐 보이지는 않아서 그냥 이렇게 다양한 웨이트로도 만들 수 있구나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회사의 폰트바다라는 클라우드 서비스에 이 폰트가 추가되었고, 체험 라이센스를 일반인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나도 등록하여 한글날에 받을 수 있었다.
구글에서 Noto CJK#라는 한중일 통합 폰트를 발표했다. Android 5.0과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기본 폰트로 지정된 상태다. 한글명으로 본고딕인데, 맑은 고딕과 꽤 흡사하게 생겼다. 무료폰트 치고는 웨이트가 7종이라 상당히 많다. 다만 나는 그렇게 많이 쓸 것 같지는 않다.
윤멤버십도 체험판#이 나왔다. 다른 회사들에 비해 매우 짧은 것이 특징이다. 약 두 달. 사실 나는 윤멤버십P의 모든 폰트를 이미 사용해 본 상태였지만, 그래도 체험판이 나왔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2014년 한글날에는 네이버에서 가는 나눔바른고딕을 배포했다. 5가지 웨이트가 지원되어 이제 일반인들도 충분히 쓸 만해졌다고 느꼈지만 다른 폰트들에 이미 빠져버린 나를 돌리기에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롤러코스터 TV에서 많이 사용하는 글씨체인 Rix개봉박두를 제작한 폰트릭스#라는 회사가 있다. 그런데 여기는 아무래도 클라우드 서비스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2015년 새해 소망 댓글 이벤트가 있어서 거기에 클라우드 서비스를 만들어 달라고 적어서 당첨까지 되었는데도 여전히 변화가 없다. 취약점을 찾아보려고 만 원쯤의 폰트 하나를 결제까지 해 보았지만 좀 어렵다. 필자주: 2019년 2월 현재 폰트릭스는 클라우드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취약점도 확인했다.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정리하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글이 길어진 감이 없잖아 있다. 하여튼, 이 글의 제목인 굴림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산돌구름을 쓰기도 전에 봤던 영상인데, 산돌커뮤니케이션의 대표이신 석금호 님이 강연하신 영상#을 보고 일본 기술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체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포부를 세운 석금호 님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굴림이 일본 나루체의 디자인을 그대로 따 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정말 굴림이라는 글자형 자체가 싫어졌었다. 주변에 많이 티가 난 것인지 굴림과 관련된 언급만 되어도 주위에서 시선들이 나를 향하곤 했다.
그런데 어제, 집에 와서 저저번 주 주말에 주문했던 <the T> 4호를 읽었다. 중간에 윤굴림700과 관련된 부분이 있어서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필자주: 그런데 2015년 세상에 나온다던 윤굴림700은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2018년 3월에야 3가지 웨이트가 1차 출시되었다. 현재는 9가지 웨이트가 있다.
글 초반부터 나를 뒤흔들어 놓은 문단을 소개한다.
굴림체는 일본 서체이니 사용하지 말자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과 서체가 만들어지게 된 맥락을 무시한 채 또는 오독한 채 감정적으로 서체를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태도일 수 있다. 특히나 서체를 다뤄야 하는 디자인 전공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디자이너 김영준의 논문 <제목용 서체로써 굴림체의 가치 재발견 및 개발>(2012)*은 굉장히 의미 있다. (후략)
* 아래의 내용은 논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p.10)
“형태나 뼈대를 가져왔다는 것이 그 서체의 모든 것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한글과 일본의 가나는 서로의 글자 형태가 다르고 구성 및 표현방식이 다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나루체의 형태를 ‘참고’나 ‘차용’한 것이지 ‘모방’이나 ‘표절’ 따위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일 감정이 크게 한몫했다고 판단된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하였고, 여러 침략과 약탈을 많이 당한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악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굴림체는 둥근고딕체의 한 장르이다. 이러한 감정이 커진다면 한글 문자의 발전에 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들은 굴림체를 온전히 하나의 서체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바로 본문에서 소개된 논문#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한글 요약의 “글자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여러 방식 중 서체 개발을 가장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태도이다.”라는 문장이 굉장히 어색한 표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개발을”을 “개발은”으로 바꾸면 좀 괜찮을 듯. 읽어보면서 내가 과연 왜 굴림체를 싫어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뒤돌아보게 되었다. 윤굴림700 글에서도 발췌한 10페이지의 상단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2010년도에 올라온 글이 한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디자이너 전공자 학생이 올린 글로 <굴림체는 일본 서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의 글을 올렸고, 굴림체를 사용하지 말자는 여론까지 생겨났다.
해당 글을 찾아보았는데, 간단하게 한 줄 요약을 하자면 “일본에서 왔으니 쓰지 말자”가 주 논리였다. 여러 해명이 아래에 붙어 있었는데, 그래도 주 논리는 역시 위에서 밝힌 것과 같았다. 과연 일본에서 왔다는 이유뿐으로 쓰지 말자는 의견이 정당화될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이미 폰트로 탄생한 이상, 그에 적합한 사용 용도를 찾고 잘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양재와당체로 만든 PPT가 있다. 과연 이게 이 글씨체 자체의 문제인지 잘 생각해 보자.
나도 굴림체가 싫었지만, “굴림체가 왜 싫으냐?”라고 물었을 때 나오는 답변이 단순히 일본에서 왔기 때문이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굴림체의 모양적 특성, 실제로 사용 시 부족한 점이 싫은 것이라면 모를까, 단순히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등으로 한 글꼴이 이렇게 무시당하는 현상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나쁜 타이포그래피는 있어도, 나쁜 글자체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모든 폰트는 제각각의 필요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일 테고, 그 목적에 맞게 사용했을 때에 가장 좋은 것이 아닐까.